[Human Library]연극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들
[Human Library]연극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들
  • 예술도서관 독립기획자 서 린
  • 승인 2024.04.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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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영상 매체와 달리 공연 예술은 극장이라는 관객과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직접 마주하고, 소통할 수 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오고, 마지막 암전이 되는 순간까지 무대는 누군가가 진짜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변한다. 그들이 갈등과 싸우고, 이겨내는 모든 순간들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렇게 공연 예술은 관객과 직접 소통하며 오랫동안 우리 사회 체계가 가진 문제점을 포착하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혐오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나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될 수 있다. 혐오하는 사회가 아닌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무대 위에서는 각자의 목소리로 투쟁하고 있다.

열녀문에 불을 내기까지,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

작년 연말에 공연되었던 극단 ‘글과 무대’의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박씨전은 누가 썼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 규방에 모인 여성들이 글을 쓰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박씨전을 완성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열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찾아온 혼란과 무질서로 인하여 여성의 정절과 순종은 더욱 강화되었고, 남편을 잃거나 외간 남자로부터 범해진 여성들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면서 그러한 선택을 한 열녀의 집안에 포상을 내리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열녀문을 세웠다.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 속 ‘운선’의 동생 ‘월영’ 역시 열녀가 되었으며, 마을에는 열녀문이 세워지고, 잔치가 벌어진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운선은 죽음의 진실을 찾던 중 비밀리에 활동하는 도서유통업자인 책쾌 ‘조생’을 만나게 되고, 중지했던 도서 모임을 열어 규방에 모인 여성들과 함께 박씨전의 뒷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성별과 계급, 장애, 성적 지향성을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하는 모임 속에서 박씨전은 각자의 마음이 담긴 한 줄 한 줄이 모여 완성되는 과정이 8명의 인물들이 몰아가며 박씨전의 인물을 연기하는 진행 방식을 통해 그려진다. 이후 운선은 동생의 죽음이 열녀의 선택을 강요한 시부모의 압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열녀문에 불을 내며 동생의 장례식을 치른다. 이들에게 박씨전은 정절을 위해 죽음마저 강요받던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성들의 염원과 저항이 담긴 작품이다. 사회 구조의 폭력과 침묵을 글로써 이겨내고자 했던 인물들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지금 우리 사회는 갈등에 어떻게 대항하고 이겨내고 있는지, 개인과 개인을 막고 있는 담장을 넘어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와 아주 작은 변화, 연극 ‘와이프’

올해로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한 신유청 연출의 연극 ‘와이프’는 1959년, 1988년, 2024년, 2046년, 네 번의 시간 변화를 통해 퀴어와 여성 인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극중극으로 시대마다 변화하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 공연되는데, 1959년에는 원작 그대로의 인형의 집이, 1988년에는 노르웨이어로 공연되는 상징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연출의 인형의 집이, 2024년에는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인형의 집이, 2046년에는 다시 원작 그대로의 인형의 집이 나온다. 작품 속에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간 여성 인물인 인형의 집 속 ‘노라’처럼 동성애를 혐오하고, 벽장 속에 가두던 사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벽장 문을 두드리던, 혹은 다시 벽장 속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1959년에는 수잔나와 데이지, 1988년에는 데이지의 아들 아이바와 그의 애인 에릭, 2024년에는 에릭의 딸 클레어와 59세의 아이바, 2046년에는 클레어의 딸 데이지와 수잔나. 이어지고 이어지는 이들의 100년에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사회의 억압으로 인해 떠나야 했던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다. 1959년의 데이지는 수잔나에게 함께 떠날 것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데이지는 수잔나에 대한 사랑을 남기기 위해 인형의 집에서 노라를 연기하는 수잔나가 꼭 볼 수밖에 없는 소품인 탬버린에 메세지를 남기지만, 전하지 않고 챙겨서 떠난다. 이 탬버린은 수잔나와의 이별 이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데이지를 간호하던 에릭에게 전달되고, 그의 딸 클레어에게 전달된 뒤, 다시 그녀의 딸 데이지에게 전달되어 2046년의 수잔나에게 닿는다. 2046년은 가장 1950년대와 닮아있는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연극은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장르가 되어버렸으며, 세상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의사의 꿈을 버리고 연극을 하길 원하는 데이지와 연극배우를 그만두려는 수잔나가 만난다. 탬버린을 통해 두 사람은 연대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퀴어임을 당당하게 외친다. 수잔나는 데이지에게 개구리와 트럼펫이라는 술집에서 하는 인형의 집의 쫑파티에 함께 참석할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이들은 다시 시작한다. 1988년의 아이바와 에릭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쫓겨났던 술집인 개구리와 트럼펫에서. 반복되는 역사이지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연 내내 울려 퍼지던 작은 탬버린 소리처럼, 벽장 안에 갇힌 이들의 끊임없는 두드림은 결코 헛된 움직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두를 열고, 담고, 잇는 ‘모두예술극장’ 개관

2023년 10월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은 국내 첫 장애 예술 공연장이다. 장애 예술가와 기술 스태프들이 활동에 제약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극장으로, 장애 예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작품 공모와 개발, 공연 초청 뿐만 아니라 워크숍이 운영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될 예정이다. 가장 중요한 수어 통역, 터치 투어, 음성 해설 등 접근성을 위한 시스템까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장애 예술가 뿐만 아니라 장애인 관객 역시 공연 관람이 가능하다. 장애인 관객을 위한 시스템은 모두예술극장 뿐만 아니라 두산아트센터, 정동극장 등 다양한 극장에서 지원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지만, 장애인 예술가와 관객 모두를 위한 극장은 모두예술극장이 유일하다. 관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연 예술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장 먼 예술 활동이었을 수도 있다. 서울 한복판에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은 다양성이 존중되고, 누구나 예술 활동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당연해지는 시대를 위해 이러한 변화가 계속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데이지는 완전 최전방 페미니스트 수퍼 퀴어였던 거예요.’라는 연극 ‘와이프’의 2046년 데이지의 대사처럼, 공연 예술은 어떠한 움직임에 있어서 최전방에서 세상에 맞서 싸우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무대 위에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춰내고, 이야기하고, 질문해야 한다. 비유적으로 어떠한 상징을 통해서 혹은 직접적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관객들에게 세상에서 감추고자 하는 어떠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연극 ‘와이프’의 2046년처럼 연극이 죽어가는 시대가 찾아온다고 해도,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공연 예술이 가진 힘을 믿으며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