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청목 김환경 칠화장 “일본보다 500년 앞선 우리 칠화, 잘 알려지지 못해 안타까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청목 김환경 칠화장 “일본보다 500년 앞선 우리 칠화, 잘 알려지지 못해 안타까워”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4.18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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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칠화만 보고 걸어온 60년…대기업 협업으로 초대전만 34번 개최
유명 화장품 브랜드와 합작, G20 퍼스트레이디 공식 선물로 증정되기도
“칠화에는 변화무쌍한 회화가 있다…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고유의 색감이 매력”
옻칠학과 전부 폐과, 전통공예 관심 줄어드는 추세…‘살릴 시스템 필요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오늘날까지 남아 전승되고 있는 전통공예의 여러 기술 가운데,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연원이 오래된 종목은 많지 않다. 칠화는 옻칠과 천연 안료를 혼합해 만든 전통의 색으로 회화적 표현을 하는 것으로, 우리 칠화(漆畵)의 역사는 1,6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수렵도’나 고분벽화, 신라의 ‘천마도장니’, 백제 무령왕릉 발굴 유물 등에서 우리 칠화의 장구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7년이 걸려 완성한 역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라고 칭하는 , ‘연화문건칠화병’ 앞에 비장한 표정으로 선 김환경 칠화장의 모습
▲7년이 걸려 완성한 역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라고 칭하는 , ‘연화문건칠화병’ 앞에 비장한 표정으로 선 김환경 칠화장의 모습

그러나 고려시대에 접어들고 나전칠기가 성행하며 칠화가 다소 시들해지고, 백제와 신라로부터 전해진 칠화 기술이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오늘날에는 우리 칠화가 일본보다 500년을 앞서있음에도, 칠화를 일본 문화라고 여기는 잘못된 인식이 만연한 형국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김환경 칠화장은 60년간 칠화 인생을 걸어온 장인으로서 이러한 형세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우리 칠화 문화의 저변 확대와 기술 전승에 힘써오고 있다. 현대 회화의 표현양식을 빌려와 칠화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기여하거나, 잘 알려진 기업과의 협업으로 전통 공예를 우리 곁으로 가지고 오고자 끊임 없이 노력해온 장본인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본에 전승한 칠화의 전통을 되찾자”는 마음으로 사명을 가지고 칠화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청목옻칠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장롱의 전성기로 성업을 이루었던 80년대에는 청담동에서 갤러리도 운영했다. 당시 옻칠학과 출신이거나 미대를 갓 졸업한 수많은 문하생들이 선생의 공방을 거쳐갔다.

▲김환경 칠화장의 작업실 입구 전경.
▲김환경 칠화장의 작업실 입구 전경.

그러나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부산여대, 한남대, 배제대, 시립대 등 기존에 개설되어 있던 옻칠학과가 전부 폐과되면서 그의 공방을 찾는 학생들의 발길도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됐다. 우리 전통공예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요즘, 김 칠화장은 오로지 ‘칠화’ 하나만 바라보며 힘든 환경에서도 묵묵히 한 길만 걸어왔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지난 1월, 김 칠화장에게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공예부문 대상을 시상한 바 있다. 이날 김 칠화장은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라고 짧은 수상소감을 밝혔는데, 그의 얼굴에 드러난 굳은 의지는 몇 남지 않은 칠화 전승자로서의 막대한 책임감을 담고 있는 듯 했다. 

우리 전통 공예가 일상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요즘, 김 칠화장이 걸어온 길은 분명 쉽지 않은 길이었으리라. 그가 걸어온 공예 인생과 오늘날 칠화의 현위치에 대해 듣고자, 평창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짙은 옻 향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 부문에서 수상했다. 시상식장에서 짧게 소감을 남겼는데, 그 날 못 다한 말씀이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장인이 그렇듯 나 역시 말주변이 없는 것 같다.(웃음) 대중 앞에 서 본 일도 별로 없다보니, 하고 싶은 말보다는 ‘60년 칠화 인생 마지막 상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 현장에서의 김환경 칠화장(가운데).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 현장에서의 김환경 칠화장(가운데).

-수상 이후,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동안의 근황이 궁금하다.

내가 워낙 은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날도 작업실로 돌아와서 바로 일하고, 계속 일만 한 것 같다.(웃음) 이칠용 회장이나 몇 사람에게 축하 연락도 받긴 했는데, 사실 내가 주변에도 수상 소식을 잘 알리지 않았다. ‘내가 뭘 했다고’라는 생각이 들어 대여섯 명에게만 알렸던 것 같다.

-호가 청목(淸木)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7-80년대에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셨던 윤길중 선생을 좋아해 많이 따라다녔다. 그분도 나를 종종 집에 부르곤했다. 윤길중 선생 호가 푸른 계곡, 청곡이다. 선생에게 호를 지어달라 했더니 푸른 청에 나무 목을 써 청목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1961년부터 전통 채화칠기 재현을 위한 외길을 걸었다. 칠화와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나는 사실 감수성이 풍부해서 시를 좋아하던 문학소년이었다. 그러나 밥을 굶다보니, 밥벌이로 하게 된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된 것 같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무언가가 되어야겠다 같은 생각은 없었다.

초등학교를 광주에서 나왔는데, 아버지가 독선적이고 완고한 성격이시다보니, 어린마음에 떨어져 살고 싶어 중학교는 아는 목사님 소개로 경북으로 가게 됐다. 제칠일안식교를 기반으로 하는 삼육중고등학교였는데, 학교에 기숙사, 농장, 목장이 있었다. 방과 후 돈을 받으며 농장에서 일도 하고, 새벽에는 우유 배달도 하고, 목장 청소도 했다.
 
학교 졸업 후 바로 서울에 올라왔다. 원래는 삼육 신학대학으로 진학하고자 올라왔으나, 인원이 이미 마감되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소개를 통해 별 생각 없이 조그만 공예 공방에 들어가게 된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 만들고 완성시키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김환경 칠화장의 작업실 전경
▲김환경 칠화장의 작업실 전경

-그래서 본격적으로 공예의 길로 들어선 건가.

공방에서 총 4-5년 가량을 일했는데, 기술이 좋다고 알려졌는지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후 75년 즈음에는 내 공방을 차렸다. 작게 시작했지만, 80년대 들어서는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청와대에도 납품을 하게 됐다. 80년대에는 장롱이 아주 잘 팔리던 시기였는데, 그 때 모았던 돈으로 청담동에서 갤러리도 차렸었다.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하는 말이 맞는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당시 청담동에는 사기꾼들이 아주 많았는데, 수표도 빌려주고 사기를 많이 당했다. 장인의 머리로는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었던 것 같다. (웃음) 이후 평창동으로 작업 기반을 옮겨 지금까지 쭉 작업에 매진해왔다.

올해로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된 지 20년 되는 해인데, 요즘은 경제적으로 예전처럼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칠화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칠화를 배우지 않고 떠돌아다녔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감사하고, 후회 없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전승한 칠화의 전통을 되찾자”는 사명을 가지고 칠화의 복원에 힘써왔다. 또한, 서울시무형문화재로서 칠화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청목옻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 전통 공예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어 책임감이 클 것 같다. 

우리 옻칠의 역사는 일본보다 500년이 빠른데, 아무래도 ‘옻칠하면 일본’이 되니, 우리가 너무 웅크리고 살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장인으로서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 

칠화 같은 경우에는 전승이 잘 되지 않고 있다. 내 대를 이을 제자를 키우기가 쉽지다 않다. 아무래도 이 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다 보니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것 같다. 공예시장도 현대공예에는 관심이 많으나, 전통공예에는 관심이 줄어든 상황이다.

원래는 부산여대나 한남대, 배제대, 시립대 등에 옻칠학과도 있었는데 전부 없어졌다. 공방에 들어오는 제자들도 원래는 짧게는 일 년에서 길게는 십 년도 머물렀는데 요즘은 정거장처럼 잠깐 머무르기도 하고, 배우고 떠나면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미대 출신 학생들도 내 공방을 수없이 거쳐갔는데, 칠화를 끝까지 하는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다. 한 명은 옻칠로 악세사리를 만들어 홍콩에 팔고 있다. 

국가에서 지정해준 서울시무형문화재로서, 대를 못 이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죄인이 된 듯한 죄책감과 책임감도 느낀다. 내 재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같은 현실에 암담한 기분을 느낀다.

▲작업실 한 측에 놓여있는 함 작품들.
▲작업실 한 측에 놓여있는 채화칠기함 작품들

-칠화가 더 발전하기 어려운 부분은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격도 높은 이유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도 배제하진 못 한다. 옻 자체가 비싸기 때문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재료를 사려면 2000만원은 있어야 5-6개월을 쓸 수 있다. 또, 색을 다룰 때도 숙성시키는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여러모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전통공예 보전을 위한 어떤 방안이 있을까.

한국에서의 옻칠은 일본처럼 저변 확대도 잘 되지 않고, 전통을 전승할 제자를 양성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예전에 일본에 옻칠 업계 시찰을 갔다가 시스템 측면에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일본은 장인들의 조합이 잘 되어있어, 조합에서 작업 공간도 지원해주고, 국가기관이나 개인에 작품을 판매하는 역할을 대신 수행해준다. 장인들은 비즈니스나 금전적인 문제 등 작업 외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기간에만 1,2년이 소요되고, 이후의 지원은 부족한 형국이다. 장인들이 직접 작품도 팔고 제자들도 키우고 해야하니 신경 쓸 것도 많고 작업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이래서는 도무지 저변 확대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겨진다. 국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장인들이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판매를 돕는 시스템이 보완되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 돈 버는 기관’이 아닌 ‘문화를 살릴 기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환경 칠화장
▲김환경 칠화장

-이미 문체부 산하 ‘공진원’에서 공예인들을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에서 주력하는 사업 중 하나가 공예박물관의 건립이었다. 이 경우 공예문화의 확산에는 기여할 수 있겠지만 공예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은 아니다. 공예인들이 박물관에 작품을 팔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공진원 측에서도 작품 구매를 위해 방문하는 빈도가 크게 줄었다. 예산 문제라고 들었다. 예전에는 국가 지원으로 외국에 작품을 알릴 기회도 있었고 호응도 좋았는데, 요즘은 그것도 일체 끊어져 버렸다.

기관에서도 현대 공예를 더더욱 선호하는 추세다.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야하지 않냐’ 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전통 공예를 보존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처럼 중간에서 공예인들과 소비자를 이어줄만한 기관이 필요하다. 한국은 칠화에 대한 수요도 일본에 비해 훨씬 적고, 국가나 각 기관에서 선물용으로 공수해가는 경우도 일본처럼 많지가 않다. 생계 유지가 안되니, 전통의 전승 및 유지가 되지 않고 있다. 업계의 2/3 가량이 사라졌다. 장인들이 옻칠을 버리고 떠나, 건축업계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요즘은 ‘나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 하다가, 안 되면 문 닫고 말지’란 생각이다. 참담한 현실이다. (웃음)

우리 공예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단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이라도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 한국에서 칠화는 이미 쇠락의 과정에 있고, 이대로라면 우리 것임에도 그 맥을 일본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 기관에서 또 어떤 부분을 지원해줄 수 있을지.

젊은 사람들이 옻칠의 우수성과 매력을 알 수 있도록 우리 전통 공예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작품 사진을 개인적으로 남기려니 돈이 많이 들더라. 장인들의 공예 작품들이 사장되고,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국가 기관에서 우리 공예 작품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장인 개개인이 하기에는 시간도, 돈도 많이 들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도 연구하고 장인들의 작업을 후대에도 남길 수 있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칠회화 작품 앞에 서 미소짓는 김환경 칠화장.
▲칠회화 작품 앞에 서 미소짓는 김환경 칠화장.

-90년대부터 칠예를 공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창의적인 작업을 수행해왔다. 작품에 순수회화를 도입, 칠회화 작업으로 감상용 작품을 선보였다. 이처럼 칠예의 표현영역을 확장해온 과정과 그 계기를 듣고 싶다.

회화 작품을 옻칠로 그리면 현대화가 된다. 일반 회화에 비해 칠회화는 옻칠이 자아내는 색이 훨씬 무겁고 깊이가 있다. 

백태원 선생, 운보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청록산수와 등 운보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응용해 그리곤 했다. 

칠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이러한 노력은 해오고 있으나, 사실 그렇다 해도 작품 유통이 잘 되지는 않는다. (웃음)

-국내 최대 화장품 업체와 몇 차례 합작이 있었다. 특히, 2010년에 제작된 채화칠기함은 ‘설화수 영부인 세트’로 2010 서울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퍼스트레이디에게 공식 선물로 증정됐다. 이외에도 기업과 협업한 사례가 몇 차례 있는 걸로 안다.

10년 가량의 장기간 파트너십을 통해 협업해왔다. 보통 기획상품으로 전국 200-250개의 점포에 공급하기 위해 300만원짜리 패키지 150개 가량을 제작했다. 함만 150만원이니, VIP고객들에게만 판매가 됐었다. 희소성이 있다 보니, 수요가 많았다. 그렇게 일 년에 네 다섯번 씩 십년 가량의 협업이 진행됐다.

G20 정상회의 때도 300세트 가량을 제작했다. 특별히 따로 무언가를 더 고려하기보다는, 모든 작품을 제작할 때 그렇듯이, 그저 열심히 했다. 

아모레퍼시픽 말고도, 제일모직과 20년 협업을 했다. 2000만원 넘는 양복이 있는데, 120벌 가량을 옻칠 상자 안에 넣어 왕실이나 대통령 등에게도 보내고, 판매도 했었다. 후에 합병이 되면서 파트너십은 종료됐다.

신세계나 롯데, 현대 등의 대기업에서 초대 받아 총 34번의 초대전도 열었다. 이 부분에서는 공예인으로서 여한이 없다. 공예시장이 어려운 만큼, 이런 기회를 단 한번도 얻지 못하는 공예인도 있기 때문에 나는 공예인으로서 축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김환경 칠화장이 _마지막 작품_이라고 칭하는 작품.
▲김환경 칠화장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칭하는 ‘연화문건칠화병’(100x80)

-잘 알려져있지 않은 칠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옛날에 옻칠은 천연 방부제로 사용됐다. 대부분의 질병은 수인성 세균에서 비롯되는데, 그 세균을 박멸하는 것이 옻칠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방에 옻칠 물건이 작은 것이라도 꼭 하나 씩은 있다. 칠회화 작품도 걸어두면 공기 정화와 세균 박멸 등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옻칠의 순기능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깝다.

또한, 칠화의 매력으로 고유의 색감을 빼놓을 수 없다. 원색에서 조금은 가라앉은 칠화의 색을 "깊고 따뜻한 아름다움"이라고 불러 왔다. 칠화는 처음 그렸을 때와 반 년, 1년, 2년, 3년 후의 모습이 다 다르다. 색이 3년은 있어야 올라오는 셈이다. 이렇게 끊임 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두고 ‘색상이 옷을 벗는다’고 얘기하곤 한다. 어두워지는 것과 더 밝아지는 것을 느끼는 과정이 있다. 칠화에서는 변화무쌍한 회화를 느낄 수 있다. 

-좀 더 확장하고 싶은 분야나,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면?

없다. 나는 작업실 입구에 놓여있는 작품을 만들면서, 이 때도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칠화 장인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