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1세대 조경가 손에서 피어난 자연의 예술…MMCA 《정영선》展
[현장스케치] 1세대 조경가 손에서 피어난 자연의 예술…MMCA 《정영선》展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4.09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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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2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아시아선수촌(1986), 선유도공원(2001) 등 60여 개 프로젝트 기록자료 500여 점
조경설계 도면, 사진, 모형, 영상, 수채 그림, 청사진 등
미술관 마당에 조경의 '시간성' 관찰할 수 있는 정원 조성
"우리나라는 경관이 아름답고 산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미술관에 조경이 찾아왔다. 지난 5일, 식목일을 기념해 ‘대한민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푸르른 손길이 닿은 자연의 예술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오는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조경’을 전시하는 경우는 이번 전시가 최초로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지난 4일 전시를 소개하는 기자간담회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4일 진행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기자간담회 현장
▲지난 4일 진행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을 찍는 기자들의 모습에 쑥쓰러움을 표하던 정영선 조경가는 “조경이란 분야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게 50년대이니,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의 1호 졸업생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조경의 역사와 함께 되짚었다. 이어 "조경이 건축 분야의 일부로 여겨져온 순간이 많은데, 조경으로 이렇게 전시를 한다는 것이 황홀하고 기적과 같이 느껴진다"라며, "조경학과 1호 졸업생인만큼, 전시를 통해 이 분야를 알려 후학들을 위해 선배로서 길을 마련하고자 전시 제안에 기꺼이 응하게 됐다"라고 이번 전시에 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서양의 조경이 수입되기 이전 우리 고유한 조경 문화'에 대해 묻는 질문에 조경가는 고유한 차경의 원리와 정자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산이 많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한 계단식의 뒷뜰이나, '어디에서 어떤 풍경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차경의 원리에 주목한 정자 등 정원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온 전문가들도 우리 전통 조경에 놀라고 한다"라며, "우리나라는 경관이 아름답고 산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원을 이루고 있으며 그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가 바로 정원의 핵심임을 평생에 걸쳐 주장해오고 있다"라고 덧붙이며 '우리 조경'에 대한 자부심을 더했다.

▲미술관 전시마당에 조성한 정원에 대해 설명하는 조영선 조경가의 모습이다.
▲미술관 전시마당에 조성한 정원에 대해 설명하는 조영선 조경가의 모습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1941~)의 삶과 작업을 되짚어 보며,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 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반세기 동안의 조경 활동을 총망라한다. 60여 개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가의 아카이브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되며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정영선의 주제별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도시 공간 속 자연적 환경이 설계된 맥락과 고민, 예술적 노력을 드러내고, 이러한 사유와 철학을 조경건축의 직능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하고자 한다. 

전시 제목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지회 학예사는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라며, "그러한 면모를 전시 제목에 담고 싶었다"라고 소개한다. 그는 "기록된 작업만 300여 개가 넘었고, 그 중 전시의 맥락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와 대표성을 띠는 작업만 선별해 최종적으로 60여 개의 작업과 517개의 자료를 선보이게 됐다"라며, "이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간에 녹여낼 수 있을지를 미술관 내부 전문가들과 함께 고민했다"라고 기획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조경이 계절에 따라, 또 하루 안에서도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내리쬐는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업인 만큼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어떠한 전시의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지가 큰 숙제였다"라며, "그 과정에서 시간성에 집중했다"라고 말했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실 전경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실 전경

전시는 연대기적 서사를 지양하고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재구성해 크게 7개의 ‘묶음’으로 나눴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조경의 사례를 살펴본다. 한국 최초의 근대 공원인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비움의 미’를 강조한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일제강점기 철길 중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체 자본으로 건설된 경춘선을 공원화 한 <경춘선숲길> (2015~2017) 등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난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묶음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은 주요 국제 행사 개최와 더불어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화된 도시 경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사업을 다룬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및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엑스포>(1993) 등 한국의 경제, 문화, 기술적 도약의 기회였던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들을 통해 조경가가 어떻게 발전된 도시 모습의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공적인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은 경제 성장이 동반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수요가 생긴 가족단위 여가활동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정영선은 예술, 교육, 체육, 관광 등 각 문화기관과 레저시설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합문화 예술단지 <예술의전당>(1988)의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 스포츠 중심의 휴양 리조트 <휘닉스파크>(1995)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이 공개되며 이는 1980~90년대 당시 디자이너의 소통 방식을 엿보게 한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2025 예정)도 소개되는데, 마르틴 하이데거의『숲길』에서 영감을 받은 산책로의 개념 스케치가 공개된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전경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전경

네 번째 묶음 ‘정원의 재발견’은 선조로부터 향유되어 온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들여다본다. 전통정원 요소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무대가 된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으로 시작해 경기도와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의 <해동경기원>(2005),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개인 정원 <포항 별서 정원>(2008) 등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면서 ‘깊은 주름’의 지형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전통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는 건축과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탄생한 조경 작업을 살펴본다. 제주 오설록(2011, 2023)의 <티뮤지엄>, <티테라스>, <티스톤>, <이니스프리> 건축물 사이 조성한 제주 특유의 지형을 살린 개인 주택인 <모헌>(2011)의 중정 정원에 담긴 깊은 숲의 풍경, 남해 <사우스케이프>(2013)의 건물 사이 바다를 향한 시야를 가로막던 돌 언덕을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은 형태로 깎아 연출한 방식 등 땅의 조건을 읽고 이를 중심으로 경관이 조성되는 과정 속에서 조경가와 건축가의 내밀한 상생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다룬다. 정영선은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 <선유도공원>(2001), <파주출판단지>(2012, 2014) 등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기반 시설에 수공간을 삽입했다. 습지를 복원하고 하천 환경을 개선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소개된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전경, 2023. ⓒ 정지현 (사진=MMCA)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전경, 2023. ⓒ 정지현 (사진=MMCA)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은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 치유적 속성이 강조된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조명한다. 식물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곳들이다.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한국 최초의 <국립수목원>(1987)의 설계 청사진과 남해의 독특한 기후대의 식생을 담은 <완도식물원>(1991)의 조감도, 미국 뉴욕주 북부의 허드슨강 상류에 자리한 원불교 명상원인 <원다르마센터>(2011)를 구상한 수채 그림, 대지와 식생 현황도 등이 공개된다.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이번 전시를 위한 새로운 정원이 마련됐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식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간성'에 따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예정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이 평생 일군 작품세계 중 엄선한 60여 개의 작업과 서울관에 특화된 2개의 신작 정원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라며, “그의 조경 작품에서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이 있기까지의 각고의 분투와 설득, 구현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