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한국발레협회의 2023년 <월드발레스타갈라> 공연
[이근수의 무용평론]한국발레협회의 2023년 <월드발레스타갈라> 공연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11.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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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와 현대무용의 경계에 선 창작들과 다시 조명된 무용수들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먼동이 터오는 새벽이면 태극권을 하러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무술의 시(詩)’ 혹은 ‘움직이는 선(禪)’이란 별명을 가진 양생술(養生術)이다. 맨발 걷기가 유행인 때문인지 간혹 맨발이 눈에 뜨인다. “발레리나가 토슈즈를 벗고 추는 춤을 발레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맨발로 하는 것은 태극권이 아닙니다.” 수련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발레협회(박재홍)가 주관하고 국내외에서 선택된 발레 스타들이 출연한 <월드 발레스타 갈라 공연>(2023.10.28.,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보고 난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5편의 러시안 발레, 3편의 로맨틱 발레, 3편의 모던발레 등 총 11편 중 토슈즈를 벗은 발레리나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연자에 따라 11편 공연작품은 이렇게도 분류된다. 볼쇼이발레단 2편(해적 그랑파드되, 백조의 호수 2막 파드되), 유니버설발레단 2편(그믐달, 해적 2막 동굴파드되), 국립발레단 1편(활), 헝가리, 체코, 네덜란드의 수석 또는 주역 무용수가 출연한 4편(지젤 2막 파드되, 코펠리아 그랑파드되, 백조의 호수 3막 그랑파드되, 일광의 본성 위에서), 그리고 프리랜서 김유진과 윤별이 출연한 2편(로미오와 줄리엣, 돈키호테 그랑파드되) 등이다. 전체 출연자 수로 보면 외국 초청이 5명이고 국내 초청이 12명이다. 인터미션 없이 120분간 계속된 이 날 출연자 중 내가 가장 주목한 무용수는 ‘윤별’이었다.

‘윤별’은 선화예고와 한예종을 졸업하고 <우루과이국립발레단(국립 소더래 우루과이 발레단)>에서 2년간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다 귀국한 후 3년간의 코로나 휴지기가 뼈아픈 30세 발레리노다.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력을 보니 한예종 재학시절, 세계 3대 무용 콩쿠르 중 하나인 잭슨 국제발레 콩쿠르 2위(2014) 입상으로 병역이 면제되었고 비엔나 국제발레콩쿠르 파드되부문 1위(2016), 헬싱키 국제발레콩쿠르 2위(2016) 등 화려한 콩쿠르 입상경력을 갖고 있다. 모스크바 국제콩쿠르 3위 입상자(2022) ‘김유진’과 함께 한 ‘돈키호테 그랑파드되’에서 본 그의 춤에선 ‘다닐 심킨(Daniil Symkin)’의 공연모습이 떠올랐다. 러시아 출신으로 잭슨콩쿠르와 불가리아 바르나콩쿠르를 석권하고 ABT와 Berlin State Ballet 수석무용수로 활동 중인 콩쿠르의 왕자가 ‘심킨’이다. 175cm의 발레리노로선 작은 키, 차돌처럼 단단한 몸매와 돈키호테에서의 탁월한 바질 역, 그리고 김연아의 트리플 악셀이 떠오르는 파워플한 공중반복 회전과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닮은꼴이었다. 작은 거인이란 칭호를 붙여주고 싶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강미선과 이동탁이 출연한 ‘그믐달’(15분)은 박재홍이 모리스 라벨의 음악으로 안무한 한국창작발레다. 반달이 어스름하게 지상을 비추는 곳에서 강미선이 이승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화병에 담긴 흰 장미꽃다발 앞에 선 여인의 독무가 서럽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놓인 삼베의 한가운데를 몸으로 가르고 떠나가는 한국적인 소재가 발레로 표현된 것이 인상적이다. 강효형이 안무하고 박슬기(수석무용수)와 김지현, 송정은, 양희재, 이은서, 정은지, 최솔지 등 7명 국립발레단원들이 춤춘 ‘활’(15분)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의 이미지가 춤이 되었다.

무대 한가운데 누운 박슬기의 몸이 한껏 당겨진 활시위가 되고 그녀의 검정색과 대비되는 흰옷의 무용수들이 숨을 멈추고 화살의 비상을 응시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끝까지 지속되는 탄력적인 춤사위가 강효형 안무의 단단한 저력을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아야 오쿠무라’(체코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와 ‘콘스탄틴 앨런’(네델란드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이 출연한 ‘일광(日光)의 본성 위에서’(15분)는 영국의 현대무용가인 데이비드 도슨이 막스 리히터의 동명 음악 ‘On the Nature of Daylight’를 발레로 풀어낸 추상 현대발레다. 사랑의 일상성과 우연성을 담담한 음조로 묘사한 음악의 정서를 잔잔한 일본적 감성으로 풀어낸 무대를 보면서 현대무용과 발레의 차이가 다만 토슈즈 때문인가를 생각나게 했다. 그들이 함께 출연한 다른 작품, ‘코펠리아 그랑파드되’에서도 두 사람이 자아내는 시적 감성이 빛났다. 평화로운 시골의 목가적 풍경을 배경으로 분홍색 원피스의 시골 소녀가 연인과 함께 상상하는 행복한 미래가 낭만적으로 다가온 작품이었다. 

<월드 발레스타 갈라 공연>을 끝으로 한 달 넘게 펼쳐진 제16회 서울국제발레축제(Seoul International Ballet Festival, K-Ballet World, 9.20~10.28)는 막을 내렸다. 그 마지막 날 ‘그믐달’, ‘활’, 그리고 현대무용과 발레의 경계를 보여준 ‘일광의 본성 위에서’와 같은 의미 있는 창작 발레와 함께 ‘김유진’, ‘윤별’등 재야의 고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