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의 뿌리를 찾아서 IV-중국편>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의 뿌리를 찾아서 IV-중국편>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4.05.0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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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진실된 불심의 족적, 또 다른 감동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같은 동양인으로서 일본이나 중국을 생각할 때에 한국인인 우리는 같은 동양인이라 생각하여 매우 가까운 느낌으로 다가올 줄 알았다.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중국문화는 오랫동안의 공산권문화, 마우쩌뚱시대의 갇혀있던 문화였다. 문화혁명으로 인한 문화파괴와 문화 부재의 시대를 겪은 경험을 가진 다른 의미의 미지의 나라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2000년 우리 일행은 문화가 파괴되어 문화라는 단어가 사라진 , 겨우 문화의 흔적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사회의 첫 숨자락을 맛보는 기분으로 중국땅을 밟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경험한 중국은 1988년도 8월, 홍콩을 거쳐 기차를 타고 밤을 새워 북경을 떠나 장춘 연길 백두산과 천지를 보고, 다시 선양과 상해를 거쳐 귀국했을 때다. 당시의 중국과 1991년 북경에서 경험한 베이징오페라(원극, 곤극, 경극을 통칭하는 용어)의 역사와 그 다양하고 깊은 속살을 볼 수 있었던 학회모임과는 전혀 다른 중국의 속살을 대하는 것 같은 진짜 여행을 이번에는 경험하였다.

가장 인상 깊고 안타까웠던 경험은 정월제사를 함께 지내며 올리는 제사 중에 70초 중반의 노세대가 기억나는 대로 10대 초중반의 어린 세대들에게 탈춤의 가사를 불러주며 받아쓰기를 이어가는 과정이었다. 다 사라진 대본과 공연의 복원과정을 엮어가며 신년 초의 <마을굿의 복원과정>을 실현하는 혁혁한 모습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이 정월고사를 지내는 동네 공동으로 쓰는 사당건물이 그 기둥의 두께나 높이로 보아 아주 크고 높은 튼실한 건물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부수다 부수다 못해 부술수 없는 부분만 남긴 것 같은 건물의 규모는 옛 조상들이 누리던 문화의 영화를 짐작하고도 남게 해, 아련한 안타까움 마저 느끼게 하였다.

오늘까지도 귓전에 남아도는 복원 대본 중에서 중국인들의 부귀와 돈에 대한 집착과 선망이 노인세대가 불러주는 복원 대사 마디마디에 스며 있어 반복되었음을 지금도 역력히 기억하게 되는 점이다. ‘비단이장사 왕서방’의 중국인 이미지를 우리 어린 시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얼기설기 학문적 고증을 거칠 틈도 없이 복원된 중국의 거리축제, 또는 탈춤축제는 2001년도 일본에서 주최한 BESETO 축제에서 처음 다룬 한·중·일 <최초의 거리축제> 에도 등장하였고, 차츰 손질을 하여 깎고 닦여지며 그 색이 갖추어짐을 보았다.

하지만 내게 이번 안휘성 귀지의 국제적 초청은 사) 한국공연예술원이 신라시대 이후  두 번째로 중국이 국제적 예우를 갖추어 한국의 문화사절을 맞는 사절단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위세는 우리를 맞이하는 구화산일대를 거느리고 있는 중심도시 귀지의 제일 높은 공산당원이 국제적 예의를 갖추어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인 나를 한국을 대표하는 주체로 정중히 맞이해 주었다. 역사적으로 그 지역을 방문한 두 번째 대한민국 사절단임을 정중하게 문서로도 증명해주었다.

김동리 중편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은 소설에서는 막연히 신라 선덕여왕 시절쯤에 왕자로 태어난 한 왕자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구화산에 와서 불도를 닦았다. 그러던 중 그 지역 주민들에게 지장보살의 깊은 불심을 일으켜 감동을 주었다는 설화가 실화로 입증이 되는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 영향으로 마침내 구화산이 중국의 4대 불성지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사람이 아닌 신라인으로 중국의 4대 불상지의 하나를 일구어 오늘날까지도 중국문화와 종교의 깊은 뿌리로 넓게 뻗어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교시절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던 버릇으로 무심히 읽은 그 소설의 주인공의 발자취를 마주하게 됐다. 그분 덕분에 국제적 위상의 대우를 받으며 구화산을 돌아보며 유난히도 거구의 큰 발을 가지고 있던 그의 험한 산꼭대기 골짜기에 자리 잡은 기도터를 보며 나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의 족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훌륭한 절을 건립하였다. 많은 신도들이 그 높은 곳을 삼보일배의 예우를 갖추며 수많은 중국인 한국 신도들이 오르고 있었다. 60이 넘은 손님은 두 사람이 태우는 가마를 타고 2,700미터의 높은 산을 올라야 한다고 권하여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산정을 올랐던 기역은 아직도 역력하다. 융숭한 대접을 받던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구화산을 뛰노는 고라니요리가 어찌도 맛있었는지. 당시 요리 재료가 구화산 고라니라는 말을 듣고 놀란 내 모습을 본 귀지지역의 공산당대표의 표정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공연 예술의 뿌리로서 구화산의 불교의례는 따로 떼어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불교 속에 뿌리 내린 소박하고 진실된 불심의 족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 지역의 산천과 기후, 습도가 어딘가 모르게 한국의 산천을 닮아있어 낯설지 않았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다음 호에는 각 나라의 문화가 어떻게 그 산천과 역사의 굴레 속에 속박되어 자리매김되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 잠식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